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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광주역사산책 5. 혐오했던 봉선동
입력 : 2013년 08월 01일(목) 00:00


기피하던 나환자촌에서 광주의 강남으로 탈바꿈

'동광원'은

폐결핵이나 정신질환 등

돈없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보는

십시일반(十匙一飯)운동을 벌인다.

또 걸인들을 데려다

하루밤 재워보내면서

귀일원(歸一園),

즉 한밤 재워보내는 동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 갈곳없는 폐질자들을 돌보는 천사동산 -

남구 봉선동(鳳仙洞)은 1914년 도천면(陶泉面) 조봉리(朝鳳里)를 아비로 이선리(伊仙里)를 어미로 두동네의 가운데자를 따서 만든 아들동네격의 법정동네 이름이다. 지금은 주월동(珠月洞)에 속해있는 이선마을 북쪽 국제호텔 구능좌우에서 봉선동 555번지일대에 있던 불노리(不老里)까지의 12동네를 조선시대 도천면이라 했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옹정, 내촌, 월촌, 이선촌, 조봉, 불로, 월산, 용정의 일곱동네가 나오지만 구한말자료에는 염주, 월산, 신촌, 신기, 백운 등이 도촌면에 포함되어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염주동, 주월동, 백운동, 봉선동 절반이 도천면이었던 셈이다. 1909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도천면 인구는 239호 1,205명이었으므로 그동안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를 알 수 있다. 도천면이름은 오늘날 주월동이 된 순복음교회(주월동 1139번지)곁에 있던 독샘(독아지샘·瓮井·龍井)에서 온 이름이다. 1914년 이 도천면이 없어지면서 부동방면에 속했던 방림동의 유안(柳岸)이란 동네와 들가운데 있던 운용(雲龍) 및 도천면 불노, 옹정, 이선, 조봉 동네를 합해 봉선리가 탄생했었다. 이때 봉선리는 효우면(孝友面)과 도천면을 합해만든 효천면(孝泉面)에 소속된다. 1935년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면서 다시 효천면은 지한면(池漢面)과 합해져 효지면(孝池面)이 되면서 광산군 효지면 봉선리가 된다. 1955년 봉선리가 광주시 봉선동이 되면서 효지면에서 벗어났고 2년만인 1957년 봉선동은 주월동과 합해 봉주동(鳳珠洞)이 되었다. 1970년 봉주동의 봉선리가 방림2동에 편입되고 1973년 봉주동에서 주월동을 독립시키면서 이때 봉선동의 이름 바탕이었던 옹정, 이선, 장산마을을 주월동에 넘겨주어 봉선동이름의 연원을 찾기 힘들게 되었다. 이때 봉선동지번으로 나오던 3개동네는 새로 주월동지번을 받아 1973년 이전의 기록과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옹정리출신으로 70년대 봉선동 886번지에 살면서 6·7대 국회의원이 되었던 이필선(李弼善·1928~2008)씨의 주소로 옛집은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뿐만아니라 1970년에서 1986년까지는 봉선동이 방림2동에 속해 당시 사회단체나 기관이름들이 방림2동으로 기록되어 오늘날의 봉선동에서 찾기힘든 행정구역지구가 되고 말았다. 보기를 들자면 정신장애복지시설인 귀일원은 광주시 기록에는 방림2동 132번지로 주소지가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한자리에 계속 있어 지금은 봉선동 132번지라 한다.

봉선동은 이처럼 왕따를 당하던 시골로 행정구역마저 이곳저곳으로 내둘리다가 1990년에야 방림2동에서 분리해 봉선동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82년 차고약별장이라 부르던 옛 유안동네 안골 봉선동산30번지에 동아여중고등 학교가 들어서고 같은해에 문성상고(95년 인문고 전환)가 조봉동네 산기슭에 들어서면서 학군이 괜챦다는 소문과 함께 아파트붐이 일어났다. 물론 백운동광장에서 남광주역에 이르는 순환도로가 준공되면서 그 주변이었던 운용동네 일대가 택지로 각광을 받았다. 오늘날 봉선동에는 31개단지 80여동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거니와 90년대에는 광주의 강남이라 불렀다. 갑작스런 개발붐에 따라 1990년 방림2동에서 봉선동이 독립하고 5년뒤 2동으로 분리했다. 오늘날 봉선 1·2동의 인구는 4만6천여명에 달하고 남구청은 물론 남부경찰서가 들어서 남구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백여전의 도천면

1백여전 이일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역시 일본사람들이 식민통치를 위해 만든 『조선지지자료』이다. 신기리(新基里)란 동네에 노인고개주막과 옹기가마, 쟁양탕골의 이름이 나온다. 염주리에 깊은골, 방축밑들땅이름이 적혀 있고 월산리(月山里)에 우마골, 건지들, 석보들 따위가 적혀있다. 도천면의 원뿌리동네라 할 수 있는 옹정리에 방축들이란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월동과 봉선동 사이 이선동네 앞에 방죽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백운리에는 진다리와 진다리주막이 있었다. 진월동(眞月洞)의 이름이 된 월전(月田·越村)에는 홍보가 있었고 수광들이 있었다. 당시 염주리에도 방죽이 있었다. 다른기록에 나오지 않는 착동(窄洞) 방죽은 지금 어디였던지 알 수 없다. 노인고개(원광병원 곁 풍암잔등)곁 동네가 신기였고 따로 신촌(新村)동네가 있었는데 이무렵의 지도를 보면 신기와 신촌이 같은 동네처럼 표기되어 있으나 백운동과 월전사이에 새로 동네가 생겼던 것 같다.

봉선동의 동쪽은 부동방면에 속해 있었다. 유안, 운용리가 부동방 이었다.

봉선동일대에 있던 동네이름들은 오늘날은 이곳 초등학교이름에 맥을 이어 다행스럽다.

△ 조봉초등학교 ~ 537번지·95년 개고

△ 유안초등학교 ~ 124번지·91년 분교로 개교

△ 불로초등학교 ~ 102-6번지·2005년(30학급)

천사들의 동산

봉선동은 광주중심에서 10리쯤의 거리에 있으면서도 독립행정구역이 되지못하고 계속 이곳저곳 행정구역에 속하면서 왕따를 당한 것은 이곳이 혐오지대로 쓰인 역사 때문이다. 제중병원 첫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Owen·吳元·1867~1909)이 1909년 4월 급성폐렴으로 43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그 후임 의료선교사로 포사이드(Forsythe·W.H·浦위렴·1873~1918)가 임명되었다. 그는 목포에서 광주로 오던길에 사경을 헤매는 여자문둥병(나병)환자를 만나 부임지인 광주제중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진료를 시작했다. 제중병원에 들렸던 최흥종(崔興琮·1880~1966)씨는 이에 감동받아 스스로 그의 조수가 되었다. 일반환자들이 꺼렸으므로 그는 봉선동 산90번지 곁에 있던 그의 땅 1천평을 나병환자 수용시설지로 내놓았다. 오늘날 이일대는 아파트숲을 이루고 있으나 당시에는 외진산골이었다.

1928년 여수에 애양원이 생기면서 이곳으로 옮겨간 7백여명의 나병환자를 수용한 문둥이촌이 이뤄졌고 교회와 학교까지 운영했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봉선동에 속해있는 문둥이촌 길목 유안(柳岸)이나 불노(不老)동네까지도 시내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광복후 1949년 화순출신 이현필(1913~1964)선생이 이끌던 기독교수도공동체식구들이 옛 문둥이촌 곁의 밤나무골(봉선동 132번지)과 감나무골(봉선동 1076번지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이 수도단체는 화순도곡출신 이현필씨가 이끌던 신앙공동체로 1950년 양림동 290번지에 문을 열었던 동광원(고아원 원장·정인세·鄭仁世·1909~1991)의 봉사자들로 일했기 때문에 흔히 동광원식구들로 통한다. 6·25전쟁이 일어난뒤 수용어린이수가 6백명에 달했으나 수도단체의 특성상 육식을 자제하고 검소한 식생활을 위해 구호물자를 다른 식료품과 바꿨다는 이유로 4년만인 1954년 8월 폐쇄령이 내려지고 수용고아들은 도내 여러 고아원으로 분산시켰다. 이같은 조치는 동광원 종사자들이 교회에는 나가지않는 무교회주의계열 신도들로 예배당 교회들에게 이단집단으로 몰렸을뿐 아니라 다른 시설들의 질시를 받았던데 있었던것 같다. 이 공동체는 봉선동 감나무골에 터를 잡은 뒤 제중병원이나 전남도립병원에서 장기무료치료를 계속할 수 없어 퇴원시키는 결핵환자나 정신장애자들을 데려다가 열사람이 한숟갈씩 모아 돌보는 십시일반(十匙一飯)운동으로 갈곳없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뿐만아니라 역대합실 노숙자나 광주대교 밑 걸인들을 데려다가 하룻밤 재워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단체이름을 귀일원(歸一園·한밤 재워보내는 동산)이라 부르기로 했다. 제중병원식당의 잔반을 거둬다가 걸러 다시 끓여먹고 명절이면 길거리에 버리는 헌식밥도 거둬다가 다시 끓여 끼니를 잇지못하고 걸식마저 못하는 가정을 찾아 배달하는 일도 했다. 수용식구가 늘면서 이들은 남원, 무등산삼밭실, 경기도 계명산(벽제), 화순 도곡, 해남, 진도, 완도 등지 묵은 밭을 개간해 자급자족하는 공동체운동을 전개해왔다. 봉선동 132번지에 있는 정신요양원과 지적장애자복지시설 귀일원과 무등자활원으로 시작한 소화자매원이 같은 공동체사람들이 키워온 복지시설이다. 귀일원이 2010년 간행한 '귀일원 60년사'를 보면 새마을운동의 교주로 일컫는 새마을운동중앙회장과 중앙연수원장을 지낸 김준(1926~ )씨도 전남대교수로 재직중 정인세씨의 설교를 듣고 교수직을 버리고 동광원 식구생활을 했다. 그가 벌인 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은 동광원의 생활지표였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책은 광주를 빛고을이라 부르게된 것은 오산학교교장과 서울YMCA 성서강좌를 맡았던 유영모(1890~1981)씨가 귀일원의 창립자 이현필선생을 만난뒤 ‘광주는 빛고을’이라 말한뒤 함석헌선생이 자주 썼다고 117쪽에 밝히고 있다. 귀일정신요양원은 1999년 복지부사회복지시설평가때 창살없이 정신장애자들을 개방형 병동에서 종사자들과 함께 지내는 모범사례로 최우수시설 평가를 받았다. 이신앙공동체는 사유재산은 기탁하고 사랑과 나눔의 신행일치를 신조로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며 헌신하는 회원수가 220명이다. 그중 귀일원에 26명이 근무하고 다른식구들은 남원 대산, 경기도 벽제, 화순 도암 등에서 같은 일들을 한다. 이처럼 혐오받던 시설이 오늘날은 봉선동의 자랑이 되어 전국복지시설들의 견학행열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설명

제중병원 의료선교사가 나환자를 데려다 치료하면서 봉선동은 당시 일반인들이 기피하는 곳이었지만 80~90년대 아파트 붐에 힘입어 지금은 남구행정의 중심지가 됐다.



귀일원 사회복지법인 정인세 설립자(가운데)와 오북환 초대이사장(왼쪽) 그리고 김준호 2대 이사장(오른쪽)

귀일원 설립당시 건물과 현대식으로 건립된 모습



봉선동 일대에 있던 동네이름들은 오늘날 이 곳 초등학교 이름으로 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