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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5>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

입력 2019.12.05. 16:09 @조덕진 mdeung@srb.co.kr
상처가 지독히 아름다운 세상에 나는 서 있네
사메바 성당이 보이는 풍경

아침에 가끔씩 조지아 정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저녁 종소리는 마음을 아득한 평화로 인도한다면 아침 종소리는 생명을 깨우는 소리이다. 어릴 적 우리 집 맞은 편 언덕 위에는 길을 떠난 자식을 기다리듯 미루나무, 포플러, 플라타너스 등의 고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덩치 큰 나무들 사이에 있던 오래된 교회에서 댕댕댕 종소리가 저녁노을을 타고 들려오면 멀리 섬 학교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가신 어머니의 기도소리처럼 종소리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트빌리시로 온 후 아침에 식탁이 있는 방에 오래 앉아 있곤 한다. 아침에 햇살이 집으로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림을 그리는 거실은 햇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혼자 빵과 우유 달걀 정도의 가벼운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창밖으로 보이는 낡은 이웃집 풍경. 감나무, 석류나무, 포도나무들이 영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열매들이 빨갛게 익어갈 쯤 이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리운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진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나를 자꾸 흔들지만 햇살이 내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여기서 먹는 식사는 매일 거의 동일하다. 밑반찬이 없으니 하루 세 끼 식사를 날마다 새로 만들어 식탁을 차려야 한다. 토마토, 양파, 당근 등이 주로 사용되는 재료이다. 매 끼 같은 음식을 먹다보니 나중에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도 느끼함에 선뜻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혼자 생활하려면 남녀를 불문하고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습득해놓으면 타향살이의 고달픔이 덜 할 것 같다.

트빌리시는 음식재료가 무척 저렴하다. 10라리(4500원)정도면 혼자서 며칠은 거뜬히 지낼 수 있는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조지아 시골에 가면 길이나 산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나 돼지, 양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방목하기 때문에 가축들이 건강하다.

조지아 사람들은 동물을 친근한 친구나 가족처럼 아끼고 돌본다. 트빌리시 거리에는 우람한 개들이 한가롭게 어슬렁거리고 어디서나 누워서 자고 있다. 이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 경계심이나 적의가 전혀 없고 사납게 짖지도 않았다. 사람들 사이를 오고가며 함께 살아간다. 신앙이 깊고 마음 착한 조지아 인들의 심성이 가장 잘 드러나 보이는 광경이다. 그러나 개들도 사람들 주위를 벗어나 자기들끼리 모여 있을 때는 사나운 본성이 드러나 시끄럽게 구는 경우가 있다. 개들 중에는 귀에 노란딱지가 붙어있는 모습이 종종 보이는데, 이는 국가에서 예망접종을 맞힌 개이다. 집도 없이 떠도는 개나 고양이들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내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사람들 속에서 그럭저럭 잘 견디며 추위를 이겨낸다고 한다.

트빌리시에는 교회가 많다. 우리나라의 좋은 터에 절이 있는 것처럼 조지아도 전망이 좋은 언덕에는 교회가 있다. 그 모습이 평화롭고 성스러운 풍경을 연출한다. 트빌리시 시내에서 삼십분 정도 서북쪽으로 가면 낮은 산에 신성한 모습으로 천 년이 넘게 서있는 즈바리 수도원이 보인다. 광야에 홀로 선 예수처럼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지아를 차로 달리다보면 햇살이 드는 산언덕이나 호수가 보이는 곳에 오랜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도원을 볼 수 있다. 조지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유대인 교회 등이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조지아 정교회이다.

행인들은 거리에서 교회가 보이면 멈춰 서서 기도를 한다. 택시 운전자들도 운전 중에 한손으로 성호를 긋는다. 신앙이 삶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있어서 길거리의 동물들을 거칠게 대하지 않고 함께 공존하는 것 같다. 트빌리시에서 교회가 보이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기도를 한다. 모든 그리운 이들을 위한 짧은 기도이다.

거리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햇살이 저무는 오후 시간에는 산책을 나간다. 하루 종일 어두운 화실에 있으면 우울함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숨 막힘. 침묵이 지속되고 그 늪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길을 걷는 일이다. 한참 길을 걷다 우연히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생소한 모습의 사내가 서 있다. 마음대로 자란 수염과 때 묻은 모자를 쓴 이방인이다. 서로를 바라보다 또 무심히 제 길을 걷는다.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 -고흐의 편지에서

고흐가 말했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가을이 길을 걷다 멈춘

창밖이 보이는 소파에 누워

그리지 않는 그림을 그려보네

아직은 차갑지 않은 바람이

내 곁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

푸른 옷을 입은 천사가

별을 먹고 있네

땅에 누운 사람은

별에 맞아 상처투성이고

들길은 밤 내 눈물이 흘린 비에

질척거려 길을 걸을 수 없네

바위투성이 언덕에 서성거리는 사람들

상처가 지독히 아름다운 세상에

나는 서 있네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이

그 모습인지 모르지

(한희원 작‘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고흐의 편지에서’)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엇일까? 가끔 “왜 그림을 그리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화가 이중섭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거리에서 죽지 않았으리라. 죽음으로 인도하고 몸과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통 속에서도 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을까? 신은 왜 예술가들을 선택하고 만들었나? 이국의 황량한 들녘은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이 무엇인지를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올 일년 동안 안식년을 갖고 작업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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