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1(월)
현재기온 22.8°c대기 좋음풍속 2.9m/s습도 40%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 사람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로서의 사람으로 살기

입력 2019.11.06. 16:53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세상을 정확히 알고, 사는 것이 아름답도록 노력하라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당연히 내일이 이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며 흔히들 산다. 어제가 가면 오늘이 찾아오고, 다시 내일이 열리는 것처럼 의심 없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흘러가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도대체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살고 있는 ‘나’의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물처럼 흘러가고 거침없이 다가오는 시간 앞에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면 세상을 사는 일이 매우 복잡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사람으로서 사는 세상이라면, 먼저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상(像)이 있어야 하고 또 내가 원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스스로 원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 때, 나로서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사는 것이라 해보자. 그러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삶이 가능하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릴 줄 알고 나아가서 자신이 원하는 사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방식을 실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춰야 할 것이다. 여기서 원하는 방식이 먼저인지,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이 먼저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 원하는 방식을 아는 것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릴 줄 알고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나로서의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나로서 세상을 사는 방식에 관해서 필자에게 아주 중요한 생각의 전환을 갖게 했던 사람이 있다. ‘어느 작가의 오후’라는 소설을 통해서 그를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페터 한트케이다. 그는 글 쓰는 사람들로부터 “언어를 독창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가”라는 평을 들었고,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작가이다.

조금 더 한트케를 소개하면, 그는 1942년 오스트리아 남부의 그리펜에서 독일 군인 아버지와 세르비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6년 첫 소설 ‘말벌들’과 희곡 ‘관객모독’이 성공을 거두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네 배우가 무대 위에 올라 뚜렷한 구성 없이 말을 주고받다가 나중에는 관객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형식의 ‘관객모독’은 인습과 전통에 대한 도전과 모독으로서 널리 화제를 뿌렸으며 실험극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 실험극은 한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상영되었으며 잘 알려져 있다.

한트케의 대표작은 시집 ‘외부 세계의 내부 세계’(1969),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1972), 예술 중편소설 ‘어느 작가의 오후’(1987) 등이 있다. 한트케는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생각의 변화를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시나리오 집필을 비롯해 빔 벤더스 감독과의 여러 차례 협업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벤더스 감독은 “한트케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냥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다.

한트케는 ‘어느 작가의 오후’라는 소설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나’가 아닌 ‘나로서의 작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작가는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해야 한다. 자신의 언어가 아닌 것을 가지고 작가라고 할 수 없다. 작가가 되었다 해서 작가이기 때문에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다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한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작가가 되어야 진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한트케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느 작가의 오후’ 나오는 첫 부분을 요약하면, 작가는 작가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쓸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때 비로소 글쓰기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는 것에 대해서, 세상에 관심 두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와 같이 모든 세상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트케에 따르면 작가는 평생 두려움을 가지고 글을 쓴다. 작가는 살아가는 동안 오직 글쓰기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당연한 언어의 한계를 알고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불확실한 출발을 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아는 것만을 바라보고 쓰게 된다. 글쓰기는 작가의 눈이 보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며 그것을 표현하여 깨워내고 이야기하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소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언어가 이를 읽는 독자에게도 비로소 언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쓰지 않았지만 쓸만한 가치를 가진 사물들, 풍경들이 우리 주변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나로서의 작가’는 자신의 눈으로 이들을 보아야 하고 언어로 탄생시켜야 한다. 이와 더불어 내 안에 있었으나 쓰지 않고 지나간 것들을 붙잡아낸다. 이해받지 못하고 잊혀졌었던 것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준다. 이렇게 보면 나로서의 작가는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옳음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한다. 비로소 이때 ‘나로서의 작가’는 제 모습을 한 사물과 만나고 분명한 기억들과 조우한다. 이때 비로소 작가는 자유의 인간이 된다. 한트케는 독자에게 말한다. 일상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 갖는 특별함을 주목하고 잘 알려진 것이기에 진부한 것이라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특별함에 눈과 귀를 열어 새로운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한트케가 시도했던 ‘작가로서의 나’로부터 ‘나로서의 작가’에로의 전환 도식을 ‘나와 작가’가 아닌, ‘나와 사람’으로 바꿔 표현하면 ‘사람으로서 나’와 ‘나로서의 사람‘이라는 도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말은 서로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다름의 의미는 사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줄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나’로서의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먼저 사람으로서 ‘나’는 사람이라는 특징이 먼저 언급되고 거기에 맞춰서 나를 완성해 가는 모델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사람이라는 정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전통과 문화적 유산에 의해서 그리고 ‘내’가 만나왔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이미 만들어진 어떤 사람의 모습이 내가 지향해야 하는 사람의 상(像)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서 나로서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 나로서의 사람에서는 내가 스스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표현이다. 곧 내가 사람이 되는 일이고, 내가 가는 길이 사람이 가야 하는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람에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방식이 곧 사람이 살아야 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창의적으로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알고 여기에 맞춰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것이 곧 사람의 모습이 되는 그런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로서의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창의적인 삶을 통한 자유의 실현이 전개되고 있음을 포함한다.

다시 한트케로 돌아와서 나로서의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나로서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한트케의 작가는 정확히 묘사하는 것을 시작한다. 정확한 묘사에는 자신의 감정이 이입되어야 한다. 거기에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끊임없이 쓴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서처럼 작가에게는 사는 것이 쓰는 일의 연속이다.

그러면 나로서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트케식으로 말하면, 나는 세상을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한다. 그리스인들이 말한 것처럼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면 바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아는 일이 내가 세상을 사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일에 대해서 나의 감정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들이 나와 통로를 갖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은 내 감정을 세상과 분리시키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나로서의 사람은 ‘어느 오후의 작가’가 쓰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사는, 살면서 느껴야 하는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비로소 우리는 서로 삶을 새롭게 하는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박해용 박사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srb.co.kr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